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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로카드-앞면-테두리.png

가만히 있어도 자연스레 올라갈 황제의 자리. 무능력하지 않은 후계자. 

황제의 아이.

양자. 황제 계승권 1위

친자. 아직까지 여황제는 없었다. 

 

 

“내가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 줄 거지.”

 

 

지독했다. 그를 표현하자니 떠오르는 수식어란 지독하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힘껏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인물. 그런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네가 진심으로 그 자리를 원한다면 나에게 진심을 보여야 하지 않겠어?

 

어때.

 

그가 그녀의 손등에 키스하며 올려다 본 눈동자에는 장난과 시기심은 보이지 않았다. 것보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알 수 없는 감정을 가진 눈빛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잊지 마. 네가 나의 진심을 짓밟는 순간, 너도 무사하지 못할 거란 걸.”

 

황제의 패를 가진, 뒤바뀐 운명 카드.

 

 

 

 

THE EMPEROR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음습한 빈민가 골목 안쪽에는 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다는 그녀의 집이 있다. 간판도 걸려 있지 않는 이곳에 들어가려면 암호가 필요했다. 어느 대부호, 설령 황제가 왔다 하더라도 암호가 없다면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는 곳. 지금 집 앞에는 검은 로브로 철저히 제 모습을 숨긴 사내와 그의 뒤를 따르는 사내가 문 앞에 서 있다. 

 

암호는 노크 세 번과 헛기침 다섯 번. 

그리고 무릎을 꿇은 뒤 정중하게, 자신을 구원해 달라 말하는 것.

 

[나를 구원해 주시오]

 

뒤를 따르던 사내는 못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금방이라도 쥐가 나올 것 같은 더러운 바닥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것마저 수치인 것을. 그저 보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꺼림칙한 이곳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아무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집 앞에 무릎 꿇은 그에게 말했다. 

“전하. 그만 일어나시지요. 아무래도 속은 것 같습니다.”

전하라고 불린 그는 말없이 제 부하는 쳐다보다가 문을 향해 미소 지었다. 

“아니. 문을 열어 주기 전에는 절대 일어나지 않아.”

 

그녀는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보통은 암호를 말하기 전부터 화를 내는 것이 일상다반사였거늘. 왠지 이 자를 집으로 들여보낸다면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기다려 보기로 했다. 저 자의 꿇고 있는 다리가 고통으로 어쩔 수 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순간을. 

 

그녀는 테이블에 올려둔 카드 더미에서 하나를 뽑아 들었다. 

[THE EMPEROR]

황제 카드. 

낯설지 않은 카드였다. 오히려 익숙하고 친근한 카드였다.

그녀는 숨을 들이 마시며 품 안에 회중시계를 꺼냈다. 지금쯤이면 다리 근육이 너덜너덜해졌겠지. 분명 나를 향해 발길질과 고약한 언사를 퍼붓겠지. 그녀는 그와 마찬가지로 로브로 자신을 덮어쓴 뒤 문에 난 미세한 틈으로 눈을 가져다 대었다. 

“……!”

분명 발견하기 어려운 틈새인 것을. 그는 그녀의 눈을 주시하며 웃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그녀의 기척을 느꼈거나 처음부터 문의 틈을 알아챘을지 모른다. 아니면 그녀가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려 한 것을 되려 그가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려 했을지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녀가 잘못 본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착각이라고 하기엔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의 미소가 그녀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나의 구원자께서는 나를 구원해 줄 마음이 없으신가 보오.”

하. 그녀는 할 수 없이 굳게 닫혔던 문고리를 열었다. 그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지만 고통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툭툭 옷을 털어내며 서 있는 모습에서 오히려 당당하다 못해 오만하게 보였다. 첫인상이 보여주는 것은 꽤 믿을 수 있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 중에 제일 정확한 것이다. 겉모습에서 드러나는 느낌은 그는 권력을 가진 높은 위치였고 그녀는 한참 낮은 아래 위치였다. 오물로 덮여 원래의 색을 알 수 없는 저 바닥같이. 그 위를 밟고 서 있는 그와 그녀의 위치는 딱 그러했다.

후의 일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녀는 그에게 암호를 요구하지 않았으리라. 

 

그를 호위하던 사내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저보다 한참 작고 툭 치면 힘없이 쓰러질 것 같은 여인은 얼마나 꽁꽁 감쌌는지 얼굴은커녕 눈조차 보지 못할 정도였다. 사내의 주인은 그녀의 집 안으로 성큼 발을 들였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호위를 하던 사내에게 특별한 말 한마디 없이 처음부터 혼자 왔던 것처럼. 지금의 그는 일반적인 누구들과 현저히 달랐다. 

큼큼. 

그녀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자신이 앉아있는 맞은편 의자에 앉도록 그에게 권했다. 사람은 숨기고 싶은 것이 많을수록 겉모습을 철저히 가리려 한다. 그녀 역시 그와 같은 마음이었지만 그녀가 입고 있는 것보다 훨씬 좋은 질감의 그의 로브만 보아도 그는 보통의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 아무리 감추려 해도 드러나는 것은 숨길 수 없을 뿐이다. 

“…… 존귀하신 분께서 오실 곳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

그녀는 그의 정체를 아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는 그녀의 입술 아래 점을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내가 황제가 될 수 있는가.”

 

 

황제.

 

 

그의 입에서 ‘황제’가 나왔다. 물론 놀라웠지만 놀란 표정까지 지을 필요는 없었다. 알고 있었으니까. 잠시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닫히는 것을 본 그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물었다. 

“이미 알고 있었군. 그럼 답하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겠지.”

그래. 당연히 답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때가 아니었다. 그의 미래가, 그의 운명을 알려주는 카드가 그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곳에. 하지만 그녀는 말을 할 수 없다. 

“굳이 점을 보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기다리신다면 어련히 황제가 되실 것을.”

“그래. 맞아. 난 당연히 황제가 될 예정이지.”

그는 또다시 미소 지었다. ‘당연한 것을 굳이 왜.’ 어느 누구도 의심치 않을 문제를 가지고 왜 그녀에게 왔을까. 그는 그래. 그렇지. 같은 말을 번복하며 중얼거리다 그녀에게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난 그대의 조언이 필요해.”

“저는 한낱 점쟁이일 뿐 전하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아니. 

그대는 나에게 꼭 필요해. 그대는 말이지. 그는 속의 말을 삼키며 말했다. 

“그대는 내 운명의 카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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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제국. 현 제국의 황제의 최측근들만 아는 사실이 있었다. 황제에게는 자신의 뒤를 맡길 아이가 없었다. 그래서 어둠이 깔려 낮과 밤이 구분되지 않는 빈민가에서 아이를 데리고 왔다. 신분이 확실하지 않고 부모도 없는 고아. 하지만 아이의 눈빛은 죽어있지 않았다. 황제는 이 아이가 언젠가 제 목숨을 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느꼈다. 황제는 제 후계자를 찾았다는 마음 하나만 가지고 아이를 자신 아래 서열로 넣었다.

 

그렇게 된 황태자는 속을 알 수 없었다. 처음 궁에 왔을 때부터 본 사람들은 이 아이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사실은 귀족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배움이 빨랐고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고 스스로 해내는 것이 많았다. 또 스스로 해낸 것이 완벽해서 흠을 잡히지도 않았다. 

물론 빈민가의 미천한 아이를 데리고 왔다는 것에 반발이 많았다. 

대부분의 황제의 신하는 귀족 중 고위 귀족이었기에 양자를 삼을 거라면 자신의 아이를 데려가 달라며 말이 많았고 아이가 자고 있는 방에 암살자를 보내 해를 입히려 하기도 했지만, 아이는 해를 입기는커녕 아침에 쌓아둔 시체들을 보며 웃고 있었다고 한다. 

성년이 될 나이가 되었을 때에는 황제 대리가 되었고 외교, 정치에 대해서 의견을 내고 그것에 믿고 따르는 자들이 많아졌다. 그가 황제가 될 것이라는 건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사안이었다. 물론 제국의 단 하나뿐인 대 신관조차도.

 

 

 

그녀. 한채아의 행방을 몰랐다면 말이지. 

 

 

“황태자의 부름을 거역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줄까.”

그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자신은 도움이 되지 않을 거란 말에 그는 칼을 뽑아 그녀의 목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날이 잘 들어 조금의 움직임에도 베일 것 같은 칼날에 비춘 채아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떨림까지 숨길 순 없었다. 그는 그 떨림을 느꼈다. 

“나는 부질없는 시간 낭비를 싫어해.”

채아는 그 말의 뜻은 알고 있지만 만약 모른다면 한없이 다정한 미소였다. 속을 알 수 없는 미소 뒤로 감춰진 것이 무엇인지. 채아가 사람들의 마음과 운명을 알고 그들을 구원해 줬다면 지금은 오히려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빌어야 할 판이었다.

“그대가 내 뜻을 따라 들어준다면 내 모든 것을 그대에게 줄 거라 약속하지.”

세상에 그 어느 누가 이런 조건을 마다할 리 있겠는가. 

하지만 채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마저 거절한다면 자신의 운명은 물거품이 될 것이고 쥐도 새도 모르게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저 또한 운명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인데 이대로 죽을 순 없었다. 

채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머리를 가렸던 로브는 칼날에 베어져 바닥에 떨어졌고 그는 얼굴을 확인했다. 

“……”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잠깐의 멈칫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채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대가 필요해.”

 

 

 

-

그레이 제국. 현 제국의 황제. 그리고 그의 보좌관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황제에게는 자신의 적통.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가 있었다. 하지만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계승권에서 제외되었다. 이제껏 여황제는 없었고 없어야 된다는 신하들의 의견 때문이었다. 그 외에 황제의 외모를 닮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낳은 아이를 단 한 번도 품에 안아보지 못한 채 어둠이 깔린 빈민가로 떠나보내야 했다. 아무도 찾아내지 못하게, 귀족들이 쉬이 발을 들이지 않는 그곳으로. 황제는 제 국민은 지켜도 제 딸아이는 지키지 못했던 것이 평생 한이었다. 그래서 늘 회중시계 안에 아이의 초상화를 넣어 생각날 때마다 꺼내보았다. 낡아버린 초상화 속 아이는 어느덧 성년이 되었다.

 

 

 

그. 박윤수의 정체를 몰랐다면 말이지. 

 

 

채아는 마지막으로 느꼈던 따스함을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의 손은 정말 따뜻했고 메말라 갈라진 입술로 힘없이 웃어준 미소는 정말 따스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를 불러준 목소리. “채아야.”

채아야. 넌 혼자가 아니야. 

너는 황제 폐하의 아이란다. 

엄마가 늘 목에 걸어두고 부적처럼 여겼던 회중시계. 그 안에는 젊은 시절의 엄마와 제복을 입은 낯선 사내가 있었다. 빈민가에 있어도 황제의 얼굴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엄마의 말대로라면 초상화 속 사내는 제 아비였고 이 나라의 주인이었다. 허. 헛웃음이 나왔다. 

 

채아의 엄마는 타로점을 보며 생계를 꾸렸다. 빈민가에서는 가난이라는 말조차 사치였다. 제 아픈 몸도 챙기지 못한 곳에서 황제의 아이를 키우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었을까. 그래도 엄마는 힘든 내색 한번 보이지 않았고 채아에게 타로카드에 대해 말해주곤 했다. 

“우리 채아는 항상 4번 카드가 나오네?”

엄마는 채아의 머리를 싹싹 쓰다듬었다. 어릴 때부터 어느 위치에 두어도 뽑으면 뽑는 대로 한결같이 나오던 카드. [THE EMPEROR] 황제 카드였다. 

저와 같은 운명을 지닌 인물이라 윤수에게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마 처음부터 시작은 달랐어도 정해져 있는 길을 걷고 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운명을 보여준 카드. “너도 항상 4번 카드가 나오는구나!”

윤수는 이미 채아의 엄마를 알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카드가 나오는 사람.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황제의 부름을 받고 나서 다른 이에게 카드점을 받았을 때에도 늘 황제 카드였다. 이쯤 하면 황제가 될 것임이 확실하다만. 황제가 흘린 시계 속 초상화가 채아였음을, 못 본 척.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이제 서로에게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하지 않겠어?”

윤수는 제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보였다. 채아가 엄마의 유품으로 받은 시계와 같은 것이었다. 채아는 놀란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윤수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황제의 적통. 황녀 한채아에게 묻겠다.”

채아는 윤수의 입술을 주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소문에 황태자 박윤수는 지독했다. 그를 표현하자니 떠오르는 수식어란 지독하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힘껏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인물. 그런 인물의 그가 채아에게 물었다. 

“내가 황태자의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 줄 거지?”

물론 채아가 황제의 자리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비밀을 알게 된 순간, 그 비밀을 현재 황제 계승권 서열 1위의 박윤수가 알게 된 것이 문제였다. 그가 문밖을 나서는 그때부터 더는 빈민가의 점쟁이가 아닌 황녀. 황제의 적통. 황제 계승권 서열이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리고 수면 위로 떠오른 채아는 여황제파와 남황제파의 싸움 속에서 자신을 지켜야만 했다. 제 아비도 지키지 못한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어쩌면 카드가 제 운명이라면 결국 황제의 자리 또한 자신의 것을 되찾는 것 아닐까. 

 

 

 

어때?

어떤 것 같아?

네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내가 되찾아 주겠다고 하잖아. 황태자의 명으로. 

잘 생각해 봐. 

 

채아는 슬며시 미소를 피워냈고 그걸 놓치지 않고 본 윤수는 조건을 내걸었다. 

“네가 진심으로 그 자리를 원한다면 나에게 진심을 보여야 하지 않겠어?”

 

그가 그녀의 손등에 키스하며 올려다 본 눈동자에는 장난과 시기심은 보이지 않았다. 것보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알 수 없는 감정을 가진 눈빛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한편으로는 오싹하고 또 한편으로는 어떤 위험을 감추고 있는지 모를 표정으로 윤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잊지 마. 네가 나의 진심을 짓밟는 순간, 너도 무사하지 못할 거란 걸.”

그대는 나에게 꼭 필요해. 그대는 말이지. 그는 속의 말을 삼키며 말했다. 

“그대는 내 운명의 카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아니.

내가 네 운명의 카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그대의 모든 것을 부술 수 있는 것도, 다시 수면 밑으로 가라앉게 만들 수 있는 것도. 목숨이 걸린 네 운명을 가지고 흔들 수 있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는 걸 기억해.

허울뿐인 황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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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황제 The Emperor

븿 정방향 : 부와 권력,책임

역방향 : 오만,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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