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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로 해석에 다소 과장되거나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폐쇄된 심문실과 같이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 속에 탁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의자가 마주 보고 있다. 뱀파이어가 천천히 걸어와 의자에 앉는다. 이때 희미한 빛이 탁상 위의 카드를 비춘다. 잠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끊어진다. 목덜미에 끔찍한 혈흔을 가진 인간이 식칼을 쥐고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간다.
뱀파이어: (카드를 응시하며) 앉아요. 이번 카드는 12번이에요. 매달린 사람.
인간: 지겹지도 않아? 매번 이런다고 뭔가 달라져?
뱀파이어: 칼은 내려놓고 얘기해요. 앉아서.
인간: (한참 서 있다 앉으며) 결과는 똑같을 거야.
뱀파이어: (카드를 가리키며) 남자는 나무에 매달려 있어요. 이 나무의 T자 모양은 일반적으로 타우 십자가를 상징하는데, 구원과 부활을 의미하고. 죽은 나무가 아니라는 걸 보면 이건 끝이 아니라 과정인 거죠.
인간: 그 전에, 왜 매달린 건데.
뱀파이어: 매달려 있으면서도 생각보다 평온한 얼굴이니까 아마 스스로 선택했을 텐데, 이성을 나타내는 머리 부근에 후광이 있잖아요. 그 이성을 통해서 인내해야 하는 무언가가 있던 거예요.
인간: 그런 것 치고는 바지가 아주 새빨간데? 육체적인 욕망 같은 게 있는 거 아냐? 식욕이라든가―
뱀파이어: 반대로 윗옷의 파란색은 차분한 감정을 상징하는 걸요. 고통과 시련을 의미하기도 해요. 허리띠는 어떤 행위가 제한되어 있다는 걸 알려 주고요.
인간은 뱀파이어의 언행이 거슬린듯 미간을 찌푸린다. 희미한 조명이 한 번 깜빡인다.
뱀파이어: 남자는 결국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계속 인내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어요.
인간: (작게 한숨을 쉬고) 남자는 나무에 매달려서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어. 인내하려 노력하고 있다기보다는 이미 도중에 포기한 상태야. 뭐든 참고 견딘다는 건 거짓말이고, 희생은 아무 쓸모도 없는 희생이었지. 결국 전부 헛수고였어.
뱀파이어: (망설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인간: 그래. 심지어 문제를 회피하고 도망쳤지. 놓으려면 확실히 놓아야 하는데. 남자는 미련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어.
뱀파이어: 미련이라.
인간: 그리고 아까 말했던 후광? 그건 깨달음이나 인내심이나 뭣도 아니야. 자기 머릿속에 꽃밭이나 펼쳐둔 거겠지. 거기서 혼자 놀고 있느라 모든 게 정체되어 있다고.
뱀파이어: 그 헛된 망상을 깨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면…… 그럼 뭔가 나아질까?
인간: 아니, 그냥 문제를 끝내. 해결할 필요도 없어. 속죄나 희생이나 복잡할 것 하나 없이, 그대로 끝마치면 되는 거야.
조명이 꺼진다. 노란 눈이 인간을 가만히 주시한다. 잠시 피가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끊어진다. 밝은 조명이 그들을 비춘다.
박윤수: (카드를 반대로 돌리며) 다시.
한채아: (정방향의 카드를 보며)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들을 버려야 해. 그게 사람이든, 기억이든. 예전에 함께하던 사람을 찾으면 안 돼. 그런 감정은 고통을 가져다 줄 뿐이니까.
박윤수: (역방향의 카드를 보고)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또 그때처럼 원망받게 되더라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만 않는다면……
한채아: 웃기지 마. 이미 수없이 반복했어. 이제 그만할 때가 온 거야. 주어진 시간은 끝났어.
박윤수: 영원히 떠날 생각이야?
한채아: 내 삶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원래대로.
박윤수: 나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우고?
한채아: (일어서며) 그래, 전부 잊을 거니까 혹시라도 찾아올 생각은 하지 마. 네 의도가 어쨌건.
무대 위에서 붉은 쇠사슬 따위가 내려온다. 한채아가 박윤수의 목에 그것을 매단다. 말 없이 무대 밖으로 퇴장하는 그녀를 보며 박윤수는 무어라 중얼거린다. 조명이 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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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다. 막이 내렸다.
박윤수는 지난 일을 돌이켜 보며 그가 만족할 수 있는 최선의 결말을 이끌어내기 위해 애썼다. 가능한 선택지를 모두 떠올리고 그 중에서 한채아에게 원망받지 않을 것들을 가려냈다. 그런 무의미한 짓을 반복하며 현재에 이르러서는 일련의 사건들을 깔끔하게 나열하고 그 장대한 이야기의 등장인물을 내세워 홀로 연극을 진행하는 수준이었다. 현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극의 등장인물이 단 두 명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결말이란 것은 절대 바뀌는 법이 없었다.
대본을 쓰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는 햇빛에 닿으면 금세 타 죽어버리는 허약한 뱀파이어와 다름없게 되었다. 마치 몇 세기 이전에 실제로 존재하던 기이한 괴담 속의 극작가 같았다. 끊임없이 비극을 양산하는 작가는 매번 괴물의 사랑을 주제로 삼았으며, 그 괴물은 언제나 절대 타락하지 않을 가장 인간다운 인간에게 사랑을 품곤 했다. 그리고 외롭게 죽음을 맞이할지언정, 인간과 함께 추락하지는 않았다. 아니, 그리하지 못했다고 기록하는 편이 확실할 것이다. 그는 인간에게 괴물이 되길 권유한 적이 있었으니까. 장담하건대, 그것은 모두가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최악의 선택지다.
괴물이란, 뱀파이어란 본래 그렇다. 고귀한 존재인 양 화려하게 꾸며진 겉모습에 비해서 그 속은 보잘 것 없다. 잘못 휘말리는 순간 끝도 시작도 아닌 어딘가로 영원히 추락할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박윤수는 한채아의 선택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여전히 그의 곁에 머물러 있거나, 그를 따라 괴물이 되기를 자처했다면 결코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죽었을지도. 인간으로서, 혹은 그의 오랜 친구인 선이 그러했듯 인간다운 뱀파이어로서.
그가 비극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점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박윤수는 당장 수십, 수백의 희곡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것들이 사라진다면 한채아에 대한 기억도 함께 사라져 줄 것만 같았다. 애초에 무엇을 위해서 오래 전에 끝난 이야기를 몇번이고 새롭게 다시 쓰고 있는가. 운명의 타로카드를 손에 들고 과거를 재해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째서 나는 극 중의 괴물을 미화하며, 카드의 방향을 비틀어 남자를 옹호하는가.
정말 기회가 있을까?
그때처럼 원망받고 견딜 자신이 있나?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면?
의문 속에, 두려움 속에 다시금 과거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성당. 시체. 택시. 먹이. 피. 저택. 장미. 식칼. 은신처. 와인. 크루즈. 손. 흉터. 눈물. 갈증. 키스. 기억. 죽음이 머지않아 찾아오는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그가 가진 마지막 의문이 떠오른다.
정상적인 관계가 뭔데?
박윤수의 회고록은 그 한 문장을 끝으로 끝나버렸다. 그렇게 또다른 타로카드를 들고 과거에 빗대어 본다. 해석이란 창조가 아닌 발견임을 알면서도, 그 자신과 한채아 사이에서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찾기 위해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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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매달린 사람
The Hanged Man
븿 정방향 : 자기희생,인내
빀 역방향 : 무의미한 희생,맹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