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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dies and Gentleman!”

사회자가 무대로 오르자 환했던 조명들이 하나씩 꺼지고 무대 위 사회자를 비춘다. 자신을 환영하는 박수와 야유에 눈을 지그시 감고 소리가 잦아들 길 기다린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사회자의 한마디에 소리가 멈추고 다음의 말을 기다린다. 광대극을 보기 전 항상 말하는 당부의 말. 이 말이 끝나면 모두가 손꼽아 기다리던 그 광대극이 시작된다. 

“이 연극을 보기에 앞서 주머니가 무의식중에 털리지 않도록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는 순간 여러분은 빈털터리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하하 하하 하하. 호호호. 하하 하하. 

“자, 주머니 단속을 잘 하셨다면 시작하겠습니다!”

 

한 사내가 무대 위로 뛰어 올라온다. 중절모를 벗어 예의를 갖추며 인사를 하고 다시 머리에 얹기 전 손을 넣었다 빼니 장미꽃 송이가 관객석에 뿌려진다. 최근 젊은 귀족들 사이에서 이 광대에게 꽃을 받았나 받지 못했나, 이것으로 편을 가르는 것이 성행한다고 한다. 그만큼 귀족사회에 영향력 있는 극이었다. 그는 내내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마술과 마임 같은 재주를 부렸고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사람들의 웃음을 앗아갔다. 비록 여러 붉은색으로 덧칠한 우스꽝스러운 가면에 펑퍼짐한 호박 바지를 입었지만 이 광대 하나를 보기 위해 얼마나 귀족들의 피 터지는 자리싸움이 일어났던가.

 

극이 끝날 때 즈음에는 모두가 손뼉을 치며 무대 위로 자신의 지갑을 던졌고 금화와 은화, 온갖 보석이 박힌 장신구와 돈이 될 만한 무엇할 것 없이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털어 올렸다. 광대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웃고 있는 가면 속 얼굴을 궁금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무대에서 실수로든 한 번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기에 극장 뒤에서 그가 나오는 시간을 두고 기다리는 여성들이 많았다. 그저 광대에 불과하지만 손짓과 걸음걸이, 말투에서 드러나는 그의 버릇은 아무리 연기로 숨긴다 해도 숨겨지지 않는 신사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연기였다면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래서 그를 연기에 능한 천재라 불렀다. 어쨌든 그의 본모습이 뭐가 되었든 간에 그녀들은 그의 실체를 보기 위해 엄청난 구애와 그와의 하룻밤을 원했다. 어느 귀족 여성은 자신의 재산을 광대에게 물려 주기 위해 성을 짓고 있다고. 또 소문에는 가면 틈으로 보인 얼굴이 조명을 받은 것처럼 하얗고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눈으로 관객을 지켜보며 입맛을 다신다고 한다.

그렇지만 믿을 만한 근거 하나 없는 소문일 뿐. 그는 겨우 얼굴에 붙어있던 가면이 떨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고정시키며 막이 내려가기를 기다렸다.

 

 

 

 

 

 

“광대짓을 하니까 정말 내가 바보같이 보이나 봐.”

그는 얼룩덜룩한 가면을 손끝에 올려 빙빙 돌리며 말했다. 제 밥줄이라 해도 무방한 가면은 더 붉거나 덜 붉은색으로 덧칠 되어 있었다. 언제부터 함께 했는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가면은 여전히 튼튼했다. 금이라도 가 있다면 차라리 부숴버릴 텐데. 쯧. 그는 혀를 찼다. 

“어떻게 생각해?”

여기. 가면의 빈 부분 말이야. 여기에 당신의 것으로 얼룩진다면 화려해질 것 같지 않아?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킬킬거렸다. 

“근데 말이야. 당신.”

“……”

“언제쯤이면 내 이름을 불러줄 거야.”

이것 봐. 이게 다 당신 거인데. 그는 무대에서 받은 돈을 그녀 눈앞에 쏟아부었다.

 

애초에 그녀에게 ‘부’란 태어났을 때부터 누리고 있던 것이라 이런 자잘한 금화 따위 눈에 찰 리 없었다. 어디에 있든 눈에 띄는 그녀는 고귀한 가문의 여식이었다. 

한 씨 가문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외동 딸.

그런 그녀가 광대의 공연을 즐겨 보러 다닌다는 소문이 돌 즈음 그는 화려한 자신의 광대 옷보다도, 오로지 무대만을 비추는 조명보다도 어둠이 내려앉은 관객석에서 뿜어 나오는 환한 빛에 홀린 듯 그녀가 있는 자리를 바라보았다. 무대 위를 장악하고 있을 때의 빛이란 오직 광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하지만 허황된 이야기이다. 만들어낸 화려함으로는 존재 자체가 빛나는 것을 이길 수 없다. 그것은 타고난 것이다. 태양. 그녀는 태양과 같았다. 바라보기만 했을 뿐인데 입술은 왜 타들어 가는 것일까. 목이 말랐다. 그는 애써 마른침을 삼켰다.

 

이때부터 였을까. 그 하나만을 보러 온 관객 중 자신이 생각하는 관객은 그녀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대에 오를 때마다 그녀의 지정석을 확인했다. 나라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영향력 높은 가문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였다. 높은 곳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녀가 마치 제 살이 타들어 가 흔적도 남지 않을 만큼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태양을 향해 닿으려 손을 뻗는 행위. 절대 동등해질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걸 알면서 그는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광대짓을 했다. 그녀의 붉은 눈이 그와 시선이 얽히길 바라면서 손을 뻗고 또 손을 뻗었다. 공연 내내 부채에 가린 얼굴을 언젠가는 꼭 그에게 보여 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나는 태양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확신이 들었다.

 

 

“미친 새끼.” 

하하. 물론 그리 말해주는 것도 맘에 들어. 개자식, 미친놈, 상대해서 안될 또라이. 이제껏 그녀가 불러준 이름이 모두 좋은 뜻은 아니지만 실제의 이름만큼이나 맘에 들었다. 저 조그만 입술을 통해 나를 생각하고 불러준 말이니까. 맞아. 난 당신에게 미쳤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야. 하지만 좀 더 뜨겁게 불러 준다면 좋을 텐데. 

“이름 알려줬잖아요. 윤수라고.”

그는 그녀의 어깨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밀어낼 틈도 주지 않은 채 조여오는 그의 팔 안에서 그녀는 퉤.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화가난 얼굴. 붉어진 뺨.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상황을 꾸미고 있는지. 

“이런다고 내가 화낼 거라 생각하지 말아요.”

그는 제 얼굴에 묻은 침을 쓱 닦아 내었다. 그녀는 늘 거짓을 연기하는 그가 사실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거다. 이런 상황일수록 침착해야 하는 건데 말이다.  

“잘 봐요. 이런 상황에서는 말이죠.”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양 볼을 지나쳐 머리를 감쌌다. 아주 사랑스러운 것을 조심히 다루듯이 감쌌다. 사실은 옆을 바라볼 수도 없고 오로지 마주 보고 있는 그의 눈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세. 저항을 하면 할수록 그녀의 시야는 그의 손바닥에 갇힐 뿐이다. 

읍! 바싹 타들어 간 거친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순식간이 닿았다. 메말랐던 입이 그녀로 인해 자유를 얻다 못해 황홀함을 느꼈다. 뜨거운 입안을 휘젓는 동안 눈을 질끈 감은 채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숨결 하나 놓치지 않도록 그녀에게 더 파고들었다. 그녀는 목을 조르듯이 누르며 감싸 쥔 채 입을 맞추는 그에게 금방이라도 시들어 버릴 것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박…윤수…”

입술 사이로 간신히 새어 나오는 제 이름이 퍽 마음에 들었다. 내 이름 제대로 알고 있었구나. 그래도 어쩌지. 이제야 태양이 내 손에 들어왔는데 놓아줄 리 없잖아. 

죽을 듯이 괴롭게. 숨을 쉬지 못하도록 누른 입술과 숨을 내뱉지 못하도록 누른 목 위로 파랗게 질려가는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광대의 가면은 그를 태양이라 여기고 탐내던 이들의 거짓된 피로 늘 물들어 있었는데 피를 흘리지 않게 한 것은 그녀가 유일하다는 것을 당신이 알아줬으면 좋겠어.

 

 

 

 

 

 

“사랑해.”

울다 지쳐 잠든 그녀의 눈가 위로 입을 맞추었다. 움켜쥐었던 그녀의 목에서 손을 떼어내자 붉은 손 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운명을 뜻하는 붉은 실이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라도 붉은 흔적을 남길 것이다. 덫에 걸린 것처럼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남는다 해도 그 또한 운명이라면. 

당신을 원한 끝이 나락이라 할지라도 나는 운명을 거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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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바보 The Fool

븿 정방향 : 순수,자유,방랑

역방향 : 함정,어리석음,무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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