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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Death

 

 

 

 

 

채아는 수풀 사이를 헤치며 걸었다. 울창한 수풀은 헤쳐도 헤쳐도 끝없이 이어져 눈앞을 가렸다. 미로처럼 이어지는 스산한 길은 한기가 돌 만큼 오싹했으나 한편으론 익숙한 느낌이었다. 두려움이 덮쳐올 때면 채아는 두 손으로 몸을 감싸고 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수풀 사이를 걸었다. 한참을 걷자 어느 순간 푸르기만 하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양옆으로 빽빽하게 솟아난 수풀 사이로 검붉은 장미들이 어지럽게 얽혀있었다.

 

 

 

원래 장미가 있었나?

 

 

 

채아는 걸음을 멈추고 우두커니 서서 빼곡히 피어난 장미 덤불을 바라보았다. 붉은 꽃잎이 끝으로 갈수록 검게 물든 장미는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시선을 끌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꼭 홀릴 것만 같은 매혹적인 자태였다. 채아는 애써 시선을 돌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새 장미에 홀리기라도 한 것인지 발걸음이 무거웠다. 끝없이 이어진 장미 덤불을 손에 잡히는 대로 뜯어내자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에 가시가 박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끈적하리만큼 달큰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피인지 장미인지 모를 향기에 채아의 몸이 술에 취한 듯 휘청였다. 숨을 참으며 꿋꿋하게 나아가다 보니 어느덧 장미와 수풀은 사라지고 가파른 절벽이 나타났다. 채아는 절벽 끝에 가만히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발밑에 끝없는 어둠의 구렁텅이가 펼쳐진 위태로운 절벽. 이곳은 채아에게 아주 익숙한 곳이었다. 오래전 이 절벽의 끝에 매달린 올가미를 구원의 동아줄인 양 붙잡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자신의 꿈, 혹은 누군가의 환각 속이었다.

 

 

 

박윤수의 환각일까?

 

 

 

일전에 박윤수가 보여준 환각에 홀려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있었다. 한 번 홀리면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치명적인 환각이었다. 다시 마주한 환각은 그때보다 훨씬 매혹적이었다.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면 그대로 검붉은 장미에 취해 피를 내어줬겠지. 채아는 의식적으로 숨을 참았다. 그때는 박윤수를 잘 몰라서 홀릴 뻔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심장 깊숙한 곳, 마음의 밑바닥까지 투명하게 꺼내 보이는 박윤수가 거는 음흉한 환각쯤은 손쉽게 뿌리칠 수 있었다. 다만 이번에도 절벽 끝에서 올가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했다. 동아줄이라 착각했던 그 올가미... 채아는 절벽 끄트머리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늘 올가미가 걸려있던 자리에는 익숙한 밧줄 대신 카드 한 장이 놓여있었다. 평범한 타로 카드처럼 생겼지만 가까이서 보니 뒷면에 기이한 무늬가 빼곡히 새겨져있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채아는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카드를 들어 올렸다. 카드에 손끝이 닿은 순간, 박윤수의 노란 눈을 처음 마주했던 순간처럼 기묘한 감각이 온몸을 훑어내렸다. 심장이 가파르게 쿵쿵 뛰면서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채아는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카드를 뒤집었다.

 

 

 

{Death}

 

 

 

소름 끼치게 짜릿한 감각이 온몸을 마비시켰다. 멀쩡히 내쉬던 숨이 한순간 멈추고 가쁘게 뛰던 심장이 멎어버렸다. 채아는 카드를 든 채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등 뒤로 몰아치는 거센 바람과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뻣뻣한 고개를 돌리고 바라본 곳에는 장미 덤불 사이에서 노란 눈으로 자신을 지켜보는 박윤수가 있었다.

 

 

 

 

 

*

 

아,

 

 

 

헉...!

 

 

 

채아는 발작적으로 두 눈을 꿈뻑였다.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손아귀의 이불을 구기듯이 붙잡았다. 소름 끼치게 음산한 꿈이었다. 카드를 발견한 순간부터 사납게 뛰던 심장이 현실에서도 불쾌하게 떨렸다.

 

“채아씨,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악몽이라도 꾼 거예요?”

 

 

노란빛이 채아를 훑었다. 채아는 어둑한 침실을 밝히는 유일한 그 빛에 의지해 가슴 위로 손을 올리고 힘주어 꾸욱 눌렀다. 부드러운 가운을 두른 팔이 잘게 떨리는 어깨를 단단히 감싸 쥐었다.

 

 

“아, 아냐. 아무것도... 그냥 꿈이었어.”

 

 

윤수는 걱정스런 눈길로 정말 괜찮냐며 몇 번이고 묻더니 아무 대답이 없는 채아를 끌어안고 가볍게 토닥였다. 채아는 넓고 따듯한 품에 안겨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냥 꿈...

 

정말?

 

 

채아는 억지로 눈을 감았으나 윤수의 품에서 밤을 꼬박 지새웠다. 다시 악몽을 꿀까 두려웠다.

 

 

 

 

 

다음날 아침 채아는 아일랜드 식탁에 앉아 분주하게 식사를 준비하는 윤수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어젯밤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윤수는 잠시 생각에 잠긴듯하더니 이내 굳은 표정을 풀고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채아를 달랬다.

 

“아무래도 요즘 예민해서 그런가 봐요. 곧 그날이 다가오기도 하고...”

“그래, 그런가 봐.”

 

네 말이 그렇다면 맞겠지, 뭐. 채아는 작게 하품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악몽을 꾼 후 한숨도 자지 못해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다. 채아 역시 그저 꿈일 뿐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꿈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오랫동안 잔상처럼 뇌리에 박혀있었다. 윤수는 생각에 잠긴 채아 앞에 노릇하게 굽힌 스테이크 그릇을 밀어주며 그릇 끄트머리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부드러운 손길은 마치 안심 시키듯이 한참이나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불규칙하게 요동치던 심장이 거짓말처럼 조금씩 가라앉았다. 둘 사이에 그간 쌓여온 제법 두터운 믿음과 신뢰에서 비롯된 효과였다. 윤수는 기분이 좋은 듯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손톱자국이 남은 채아의 주먹을 조심스레 펴고 포크를 쥐여주었다.

 

“너무 불안해하지 마요. 다 괜찮을 거예요. 제가 곁에 있으니까.”

 

윤수의 말엔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 결국 모든 게 잘 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채아는 한결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먹기 좋게 썰린 부드러운 고깃 조각을 삼켰다. 지금처럼 평화로운 일상이 벌써 수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고작 꿈 하나에 이렇게나 신경을 곤두세웠단 게 새삼 멋쩍었다. 때때로 채아는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자신의 삶이란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랜 시간 세상에 쫓기듯이 살아온 탓이었다. 행복이란 꼭 신이 장난삼아 손에 쥐여준 장난감 같았다. 내 것처럼 여겨도 어느 날 갑자기 빼앗길 것만 같았다.

채아는 마지막 스테이크 조각을 삼키며 와인을 따르는 윤수를 바라봤다. 이 모든 게 환각이라면 깨지 않을 것이고 현실이라면 뺏기지 않을 것이다. 채아는 윤수가 건넨 와인잔을 받아들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단숨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목을 타고 흐르는 와인이 달콤했다.

 

 

 

 

 

모든 게 제자리에 완벽히 들어맞으며 평화로워 보였다. 채아를 보러 오기 위해 로즈는 영국에서 한국까지 날아왔으며 그림이는 독립한 후 제법 오랜만에 저택에 발걸음 했다. 레오는 [한채아! 우리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어찌 됐든 축하한다. 박윤수한테도 안부 전해줘.]라는 짧은 쪽지와 함게 축하의 선물을 보내오기까지 했다. 물론 쪽지는 박윤수의 손길에 흔적도 없이 찢어졌다.

 

 

정말이지 모든 게 순조롭고 평화롭기만 했다. 어느 동화처럼 '그렇게 모두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하고 끝날 것 같은 그런 삶. 그러나 채아의 내면은 자꾸만 슬픈 결말을 떠올렸다. 불길한 꿈으로부터 피어난 불안감은 산불처럼 온 마음에 번져가고 있었다. 채아는 하루에도 몇 번씩 몽유병을 앓는 것처럼 두 눈을 뜬 채로 꿈을 꿨다. 몽롱한 의식을 스쳐지나는 꿈속에서 채아는 장미 덤불 안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 익숙한 카드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깜빡인 순간, 눈앞에 다시 평범한 일상이 펼쳐졌다. 그 후엔 심장이 숨 막히게 조여왔다. 채아는 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원인 모를 메스꺼움에 속이 울렁이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박윤수, 나 방금 잠들었었어?"

 

"아뇨? 채아씨, 방금 졸았어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채아를 보며 윤수는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채아씨, 방금 너무 귀여웠어요. 어어, 그래. 아니, 뭔 소리야. 채아는 대충 얼버무리며 말을 돌렸다. 착각일지도 모를 일로 괜히 윤수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으로 최근의 기묘한 현상들을 찬찬히 더듬었다. 정말 못 봤다고? 분명 잠들었던 거 같은데... 대화 중에,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중에, 함께 거리를 걷는 도중에 채아는 몇 번이고 퓨즈가 나간 전구처럼 의식이 깜빡이며 꿈에 빠져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세상은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채아는 혼란스러웠다.

 

 

정말 이상해. 뭔가 잘못된 것 같아.

 

 

하지만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더 이상한 것은, 박윤수는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곁을 지키면서 윤수는 눈먼 사람처럼 채아의 불안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채아는 멍하니 생각에 잠긴 저를 눈앞에 두고 곧 펼쳐질 장밋빛 영원에 대해 떠드는 윤수의 모습이 낯설었다.

 

 

 

 

 

 

*

 

 

 

어긋난 태엽시계가 삐걱이며 돌아가듯 시간은 흐르고 흘러 '그날' 밤이 다가왔다. 사뿐히 옮기는 발자취를 따라 치마의 기나긴 끝자락이 바닥을 스쳤다. 채아는 오늘을 위해 윤수가 선물한 검은 원피스를 입고 금강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스테인드 글라스 너머로 하얀 달빛만이 내부를 밝히는 성당의 가장 안쪽, 예수 그리스도 조각상 아래에 이 순간을 위해 하얀 베일로 덮은 제단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채아는 잘 닦여 반짝이는 제단 위로 손을 올렸다. 이미 수천 번 고민해서 내린 답이었다. 하지만 막상 이곳에 서니 확신은 흐릿해지고 불안의 불씨는 조금씩 피어올랐다. 정말 이게 최선일까? 채아는 오늘을 위해 많은 것을 각오했다. 기억을 모두 지우고 박윤수를 떠난다 해도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영원의 선택을 내렸다. 고민의 원인은 여러 가지였으나 선택의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사랑, 그것이 채아를 오늘날로 이끌었다. 내가 사랑을 이유로 이런 선택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새삼스러우면서 한편으론 허무한 마음에 조소를 뱉었다. 차가운 입김이 안개가 되어 제단 위로 내려앉았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제 목숨은 박윤수의 손에 달려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채아 자신이었다. 윤수는 채아의 목에 올가미를 걸었고 채아는 매듭을 조였다. 이제 올가미는 목걸이가 될 것이다.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고 윤수가 들어왔다. 윤수 역시 검은 옷으로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순간 채아와 같은 모습이길 바란 마음에서였다. 환한 달빛이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해 경건한 성당 안을 영롱이는 빛으로 채웠다. 자정의 순간, 제단 앞에 서서 숨을 죽인 채 다가올 행위를 기다리는 채아의 앞으로 윤수가 천천히 다가섰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 은잔 안에는 검붉은 피가 가득 담겨있어 윤수가 한걸음 두 걸음 제단 가까이 다가설 때마다 넘쳐흐를 듯이 찰랑거렸다. 윤수는 한 손을 뻗어 검은 원피스 위로 곱게 모아진 채아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채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경배하는 것 같기도, 축복을 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차가운 입술이 내려앉은 곳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윤수의 입가에 얼룩져있던 붉은 피가 채아의 손등에 낙인처럼 묻어났다. 윤수는 채아의 손을 매만지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한채아. 정말 준비 됐어?”

 

 

후회하지 않을 준비가 됐어?

 

 

윤수가 하는 양을 말없이 지켜보던 채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노란 눈동자가 빛을 내며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로지 자신만을 향한 빛이었다.

 

언젠가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저 눈동자가 나를 올바른 곳으로 인도해 주겠지.

 

채아는 덤덤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숙이는 짧은 순간에도 윤수와 시선을 맞추는 것을 잊지 않았다. 빛을 뿜어내는 두 눈동자를 확신으로 물들이고 싶었다. 채아의 결연한 눈빛에 화답하듯 윤수는 싱긋 마주 웃어주며 채아를 따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에게 죽음이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었다. 이 순간은 인간 한채아의 죽음이자 뱀파이어 한채아의 탄생이 될 것이었다.

 

 

 

 

 

 

채아는 붉은 낙인이 새겨진 손으로 윤수의 손에 들린 은잔을 끌어당겨 입가에 대었다. 고개를 젖히며 그 안에 담긴 액체를 단숨에 넘겼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비릿한 피에서 은은한 와인향이 느껴졌다. 윤수의 피가 온몸에 퍼지며 지나가는 자리마다 독을 삼킨 것처럼 화끈거렸다. 채아는 은잔을 떨어트리고 윤수의 손을 뿌리쳤다.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붙잡고 고통스러운 헛구역질을 했다. 혈관을 타고 온몸에 흐르는 이 강렬한 불꽃을 다 토해내고 싶었다. 윤수는 제 목을 조르는 채아의 두 손을 낚아채며 날카로운 송곳니로 자신의 혀를 깨물었다. 비틀거리는 채아의 얼굴을 다급하게 붙들고 악다문 입술을 억지로 벌려 입안으로 자신의 피를 넘겨주었다. 피에 젖은 혀는 고통으로 뒤틀린 혀를 달래듯 헤집으며 입술 새로 욕망을 더 채워 넣었다. 윤수는 채아의 숨이 막히지 않도록 살짝씩 입술을 떼었다. 맞물린 두 입술이 벌어진 순간마다 뜨거운 피가 뚝뚝 떨어져 돌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채아의 몸은 점점 힘이 빠지며 끝내 축 늘어졌다. 온몸의 피가 들끓으며 열기로 증발하는 듯한 감각에 몸부림치던 채아는 한순간 발아래 고인 피 웅덩이 위로 쓰러졌다. 윤수는 기절한 채아를 안아들고 핏자국이 얼룩진 제단 위에 가지런히 눕혔다.

 

잠깐의 기다림 끝에 너는 노란 눈동자로 새로운 삶에 눈을 뜨겠지.

 

윤수는 입가에 흐르는 자신의 피를 검은 셔츠의 소매로 거칠게 문질러 닦으며 잠든 채아를 바라보았다.

 

긴 밤이 되겠지만 결코 외롭지 않았다.

 

 

 

 

 

 

*

 

 

윤수는 죽은 듯이 누워있는 채아를 바라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얗게 질린 모습이 꼭 생명을 다한 것 같았다. 핏기 없는 입술, 바싹 말라 머린 피부, 손을 대면 끊어질 것만 같은 검은 머리카락, 창백한 안색... 누가 봐도 영락없이 죽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성당에서의 밤 이후 채아는 보름째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모든 것이 시작된 성당에서 함께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겠단 약속은 의식이 없는 채아를 저택으로 옮기며 산산조각이 났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처음엔 당황이었다. 윤수가 예상했던 것보다 채아는 훨씬 오래 잠들어있었다.

두 번째는 부정이었다. 이미 선을 뱀파이어로 만들어본 적이 있으니 잘못됐을 리 없는 방법이었다. '한채아에겐 그저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뿐이다'. 그렇게 믿었다.

세 번째는 공포였다. 눈을 뜨지 않고 숨을 쉬지 않는 채아의 모습은 영락없이 생명을 다한 자였다.

 

그제서야 집채같은 공포가 윤수를 집어삼켰다. 공포는 순식간에 믿음이란 벽을 부수며 윤수를 잠식시켰다. 사랑을 잃어서, 자신을 이해해 줄 유일한 존재가 사라져서, 지독한 외로움이 또다시 자신을 어둠 속에 가두고 있어서 윤수는 차라리 미쳐버리고 싶을 만큼 두려웠다. 윤수는 잠든 채아의 머리맡에 앉아 버석 해진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어딜 헤매는지 알 수 없는 하얀 얼굴을 들여다보다 문득 언젠가 채아에게 들었던 꿈이 떠올랐다.

 

 

 

절벽 꼭대기의 Death 카드, 한밤중 비명을 지르며 심장을 억누르던 채아.

 

'나 방금 잠들었었어?'

 

불현듯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얼굴. 불러도 대답이 없는 입술.

뒤늦게 움찔하던 손. 막 잠에서 깬 듯 몽롱한 눈빛.

 

아, 왜 이제서야 알았을까?

 

불이 나가려하는 전구처럼 흐릿하게 깜빡이던 기억이 있었다. 눈앞을 가린 환각을 지워내자 진실이 펼쳐졌다. 불길한 예감이 윤수의 혈관을 타고 온몸에 흘렀다.

 

 

 

 

 

 

*

 

... 여기가 어디지?

 

채아는 걷고 있었다. 이번엔 장미가 빽빽하게 피어난 미로 같은 정원이었다. 검붉은 장미꽃으로 뒤덮인 가시덤불은 머리 위까지 둥글게 덮여있어 탈출구가 없는 완벽한 미로 같았다. 채아는 미로의 끝이 보일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장미 덤불은 걸을수록 더 울창해지기만 했고 어느새 머리카락에 엉겨 붙었다. 뾰족한 가시가 피부를 스치며 온몸에 생채기를 냈다. 검은 구두 위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채아는 겁에 질려 손을 적시는 피도 외면한 채 미친 듯이 장미 덤불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숨이 가빠와 점점 고개가 떨구어졌다. 갈수록 좁아지는 어지러운 길을 내달리다 보니 갑자기 뻥 뚫린 곳이 나타났다. 정신을 차리니 온몸을 옭아매던 장미 덤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대신 눈앞에 까마득한 절벽이 나타났다. 채아는 조심히 절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곳에는 깊은 어둠 대신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온통 장미로 가득 찬 끝없는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장미꽃의 잎을 따다 흩뿌려놓은 것처럼 조그만 틈도 없이 검붉은 꽃잎밖에 보이지 않는 그곳은 마치 장미로 만든 무덤 같았다. 절벽 아래서 매혹적인 향기가 풍겨와 이성을 어지럽혔다. 채아는 장미 향기에 취해 온몸이 나른해졌다. 비틀거리는 다리에 겨우 힘을 주며 주변을 둘러보자 절벽 끝에 놓인 카드 한 장이 보였다. 채아는 홀린 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주저앉듯 무릎을 꿇고 조심히 카드를 들어 올려 뒤집었다.

 

 

{Death}

 

 

그 카드였다.

 

 

*

 

 

 

헉…!

 

 

 

채아는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으나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온몸이 칼로 난도질당한 것처럼 아팠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겨우 얕은 숨을 내쉬며 반쯤 눈을 뜨자 얼굴이 온통 젖은 윤수가 보였다. 물에 빠지기라도 한 걸까? 흐릿한 정신을 붙잡으려 애쓰며 윤수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 위해 눈을 찌푸렸다. 물이라 생각했던 것은 눈물이었다. 노란 눈동자에 눈물이 그득히 차올라 새하얀 턱 선을 타고 채아의 두 뺨에 툭툭 떨어졌다. 떨어지는 눈물이 차가워 채아는 시선을 내렸다. 힘을 잃은 채 늘어진 몸은 윤수의 품에 안겨 겨우 의지하고 있었다. 몸이 닿은 곳마다 서로의 옷은 붉은 피로 젖어있었다. 자신에게서 흘러나온 피였다. 채아는 마른 입술을 달싹였으나 사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순간이 오리라 예상했던 것처럼 심장은 뛰는 걸 멈춘 채였다.

 

 

“한채아..! 한채아, 제발... ”

 

윤수는 커다란 손으로 채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울음이 번진 절박한 목소리를 듣자 그제서야 낡은 필름이 삐걱이며 돌아가듯 채아의 머릿속에 까마득한 장면들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아버지란 남자의 습격, 피투성이가 된 박윤수, 역시나 피투성이가 되어 차가운 땅 위에서 서서히 정신을 잃어가던 자신, 이빨을 드러낸 채 망설이던 박윤수, 입안에서 맴돌던 씁쓸한 피의 맛...

 

채아는 어지러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찬찬히 기억을 더듬고 싶었는데 자꾸만 현기증이 일어 머릿속을 흩트려놨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될까.

 

이대로 죽는 건가? 뱀파이어가 되지 못하고?

악착같이 살아남아온 내가 여기서 죽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뱀파이어가 될 걸 그랬나.

 

 

피식- 채아는 자신을 향해 비웃음을 지었다. 바보. 바보 같은 한채아. 이럴 줄 알았으면서. 환상은 그저 허상에 불과했다. 제 손으로 뱀파이어가 되길 거부한 주제에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떠올린 비겁한 바람. 참 염치없는 환상이었다. 박윤수의 눈을 바라보며 채아는 생각했다. 저 투명한 눈동자로 인간의 마음까지 꿰뚫어볼 순 없어서 다행이라고. 자신이 이런 생각을 했단 걸 알면 슬퍼할 테니까.

채아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윤수를 바라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절망에 빠진 노란 눈동자가 쓰라렸다. 핏기를 잃은 뺨 위로 뚝뚝 내리는 절망이 아팠다. 까마득히 멀어지는 의식 속에 채아는 윤수에게 처음 말을 걸던 순간을 곱씹었다. 끝과 처음은 이어져 있으니까.

 

네게 말을 걸었던 건 순전히 실수였는데..

너를 사랑하게 된 것도 실수였을까?

 

삶의 끝에서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

 

 

 

 

 

 

 

*

 

 

 

헉-!

 

 

 

탄성과 함께 채아는 눈을 떴다. 눈앞에 푸른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며 멍하니 누워있다 차가운 땅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더러운 흙먼지가 생채기 사이를 파고들어 따가움에 얼굴을 찡그렸다. 느릿하게 주변을 둘러보자 발아래에 익숙한 절벽이 드리워있었다. 채아는 덤덤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절벽의 끝에 한층 더 가까워진 채로 기절해있었다.

 

죽음이 가까워진 걸까?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몇 번이고 절벽 위에서 깨어나다 보니 이젠 낭떠러지에 매달려 눈을 떠도 그러려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점점 끝을 받아들이는 거구나. 차라리 속이 시원했다. 희망고문만큼 잔인하고 지루한 행복은 없었다.

 

허탈한 한숨을 쉬며 절벽 아래에 깔린 칠흑같은 어둠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마치 기다린 것처럼 땅 위에 가지런히 놓인 익숙한 카드 두 장이 보였다. 채아는 카드를 뒤집어보기 전에도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그것들은 {Death} 였다.

 

 

 

 

채아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 모든 건 선택에 따른 결과란 것을.

삶이 연극이라면 지금까지는 1막이었고, 죽음 이후는 2막이었다.

1막의 엔딩 크레딧 앞에서 망설이는 채아에게 카드는 각자의 결말을 보여주었다.

 

이제 선택은 자신의 몫이었다.

 

 

 

 

채아는 두 장의 카드를 앞에 두고 지난날의 회상에 빠져들었다. 삶은 언제나 격변의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며 보란듯이 예상을 빗나가곤 했다.

 

박윤수를 만난 것.

박윤수의 인생에 끼어든 것.

박윤수가 나의 인생에 끼어든 것.

지독한 올가미로 서로를 옭아맨 것...

 

후회스러운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두려움에 도망치고 싶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운명은 어김없이 우리를 이어놨다. 채아는 확신했다. 죽음조차 자신과 윤수를 갈라놓진 못할 것이다. 지은 죄가 많고 지을 죄도 많은 우린 언젠가 지옥에 떨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지옥에서도 함께이겠지.

 

올가미로 서로의 몸을 휘감은 채..

 

 

채아는 카드를 집어 들었다. 애초에 고민한 적도 없는 것처럼 거침없이 하나의 운명을 선택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카드를 잡고 그대로 길게 찢어버렸다. 제 손으로 버린 운명을 갈기갈기 조각냈다. 어딘가에서 불어온 바람결에 손안의 카드 조각들이 날아갔다. 흘러가는 운명의 조각들을 후련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채아는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문득 자신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던 박윤수의 손길이 떠올랐다. 아, 내 인생은 단 일분 일초도 네게 묶이지 않은 순간이 없구나. 부드럽게 넘어가는 머리칼을 따라 돌아서자 다섯 걸음 뒤에 윤수가 서 있었다.

 

 

 

나를 위해 기꺼이 마중을 나온 너.

 

 

 

채아는 윤수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었다. 윤수 역시 채아를 향해 웃어 보였다. 살면서 이 순간처럼 웃어본 적이 또 있던가? 이렇게 평온하게 웃는 너를 본 적이 있었나? 마주한 미소 사이로 부는 바람이 발그레한 뺨을 간질였다. 채아는 윤수를 향해 한 발짝, 두 발짝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자신을 향해 내미는 커다란 두 손을 맞잡고 손가락을 얽혔다. 영원히 풀리지 않을 우리의 올가미. 그토록 기다려왔던 순간. 윤수는 천천히 눈을 감았고 채아는 살며시 입을 맞췄다. 달큰한 향기가 두 뱀파이어를 감싸 안았다. 찰나의 입맞춤 끝에 채아는 윤수의 손을 잡고 망설임 없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

 

 

 

헉-!

 

 

거친 숨소리와 함께 채아는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눈앞에 펼쳐져있었다.

 

 

“... 한채아!”

 

 

두 팔로 침대를 지탱하며 조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운 얼굴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단단한 팔로 자신을 받쳐안은 윤수가 보였다. 두 눈이 노랗게 물들어가는 모습을 마주하자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감정들이 밀려들었다. 그래. 난 이 눈을 보고 싶어서, 그리고 갖고 싶어서 죽음을 거스른 거야. 채아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윤수를 바라보았다. 노란빛이 달빛을 받은 윤수의 검은 머리칼 위로 내려앉았다.

 

 

 

인간 한채아의 죽음이자 뱀파이어 한채아의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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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죽음 Death

븿 정방향 : 격변,이별

역방향 : 변화의 유보,고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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